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 무너지는 교만 위에 차려진 구원의 잔치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이사야의 고백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나온 노래가 아니다. 무너진 성읍과 황폐한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먼저 본다.
우리의 하루도 때로는 폐허처럼 느껴진다. 계획이 틀어지고, 관계가 흔들리며,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마음은 쉽게 낙심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사야는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으며, 그분의 뜻은 결국 이루어진다고 노래한다.
본문은 하나님을 “가난한 자의 요새”, “환난 당한 빈궁한 자의 요새”, “폭풍 중의 피난처”, “폭양을 피하는 그늘”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강한 자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는 자에게 먼저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세상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소유해야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 준다. 인간의 교만과 견고해 보이는 성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호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의 질문은 “나는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이다.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돈, 지위, 사람의 인정만 붙잡는다면 그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상황이 바뀌어도 다시 일어설 이유를 발견한다.
이사야 25장의 절정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위해 기름진 음식과 오래 저장한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이다. 구원은 겨우 생존하는 수준의 회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풍성한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더 놀라운 약속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단지 슬픔을 잠시 잊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슬픔의 가장 깊은 뿌리인 죽음까지 삼키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
눈물은 사람마다 이유가 다르다. 상실의 눈물, 후회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견디느라 흘리는 눈물이 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가장 개인적인 아픔까지 살피시고 마침내 수치와 슬픔을 거두어 주신다. 믿음은 눈물이 없는 삶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본문 마지막에서 모압의 교만은 철저히 낮아진다. 인간이 쌓아 올린 높은 성벽은 무너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손도 꺾인다. 구원의 잔치와 교만의 몰락이 같은 장에 기록된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아짐이 아니라 겸손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성벽이 있을 수 있다. 체면, 성취, 비교, 자기확신으로 쌓은 성이다. 이사야는 그 성벽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신 하나님을 기다리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이런 고백이 남는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던 하나님이라.”
지금 눈앞의 현실이 폐허처럼 보여도 마지막 장면은 폐허가 아니다. 하나님이 차리신 잔치이며, 닦여진 눈물이며, 사라진 죽음이며, 회복된 기쁨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믿음은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주님, 내가 의지하던 높은 성을 내려놓고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