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배들(4) 헝클어진 세상을 이어 붙인 사랑의 평화주의자, 리옹의 이레네우스

"부서진 일상을 다시 빚으신다"… 이단 영지주의에 맞선 총괄갱신의 선포

핍박의 변방 리옹의 영적 아버지… 이름 그대로 평생을 바쳐 이룩한 평화

세상 탈출 아닌 삶의 온전한 회복… 꼬인 인생을 걸작으로 바꾸는 주님의 손길

 

길을 잃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사방을 둘러봐도 짙은 안개뿐이고 내가 서 있는 발밑조차 의심스러울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마음에 의지할만한 든든한 기둥을 찾게 됩니다.

 

2세기 말, 전염병과 핍박으로 교회가 통째로 흔들리던 그 시절에 수많은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주었던 따뜻한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리옹의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s, 130?~202?)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 '에이레네'(εἰρήνη)에서 왔는데, 그 뜻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름 그대로 그는 평생을 교회와 성도들의 평화를 위해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 지역인 서머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던 폴리갑 감독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삶의 자리를 저 멀리 서유럽의 끝자락인 프랑스 남부, 지금의 리옹(Lyons)으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리옹은 로마 제국의 철저한 핍박 속에서 전임 감독이 순교하는 등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자리에 이레네우스가 새로운 영적 아버지가 되어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은 미식과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는 고난 속에서 순결한 신앙을 지켜낸 거룩한 땅입니다. 이레네우스는 이 척박한 이방 땅에서 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과 뒹굴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겉보기에 화려한 무대보다는 가장 아프고 어두운 변방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레네우스가 활동하던 시절,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사상가들은 이 세상과 우리의 육체는 악하고 더러운 것이며, 오직 영적인 비밀한 지식만을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속삭였습니다. 쉽게 말해 몸으로 살아내는 일상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주장이었죠.

 

이레네우스는 이 허무맹랑한 소리에 가슴을 치며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사상이 바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 ἀνακεφαλαίωσις)'이라는 조금 어려운 이름의 가르침입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온전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등 돌리고 실패하면서 인간의 삶은 완전히 깨진 유리 조각처럼 헝클어졌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깨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모아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어 붙이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영혼만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갓난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를 거치고 청소년을 지나 어른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을 몸소 겪으시며, 아담이 실패했던 그 자리를 승리와 순종으로 다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이 세상을 탈출해서 저 멀리 우주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몸과,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이 땅이 예수 안에서 다시 건강하고 아름답게 회복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처럼, 그는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땀을 흘리는 이 평범한 일상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레네우스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였을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저 높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면서 말이죠. 학교에서 시험 성적 때문에 숨이 막히는 학생이나, 매달아 놓은 저울추처럼 아슬아슬하게 직장 생활을 버텨내는 직장인이나 모두 삶의 자리가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종교를 그저 마음 편해지는 탈출구 정도로만 여기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레네우스는 우리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이렇게 위로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그 지루한 하루, 엉망으로 꼬여버린 인간관계, 남들에게 말 못 할 아픈 과거의 상처 속에 직접 걸어 들어오셨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흙탕물 묻은 발걸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포개어 걸으시며 우리의 부서진 일상을 처음부터 다시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이 캄캄하다고 해서 인생을 쉽게 포기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낙심해서 주저앉아 있던 그 시간들조차도, 하나님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선한 도구로 바꾸어 가십니다. 가난에 찌들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눈물 흘리던 소년의 방황을 훗날 수많은 이들의 아픔을 안아주는 목회자의 밑거름으로 삼으시듯, 여러분이 통과하고 있는 그 거친 광야도 결국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회복될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내 삶의 깨진 조각들을 모아 기어이 멋진 작품으로 완성하실 그 신실하신 손길을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낼 소망을 얻게 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밝을 것이라는 희망, 그것이 바로 이레네우스가 거친 로마의 칼날 앞에서도 웃으며 전해준 평화의 비밀입니다.

 

 

 

허동보 목사(Rev. Huh Dongbo) | 수현교회(Suhyun Church)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6.06 00:05 수정 2026.06.0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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